‘노오력’이 해결할 수 없는 것.

‘금수저’ 그리고 ‘흙수저’

이미지 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602119774g

이제는 이 단어들을 보면서 단순히 금으로 혹은 흙으로 만든 숟가락만을 떠올리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수저 계급론은 사회 전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말이 되었죠. 한 사람이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정해진다는 이 이야기는 현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할 때에 인용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젊은 청년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자조 섞인 말을 할 때에 술잔과 섞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계급론은 정말 신조어에 불과한 것일까요?

가난은 과연 한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들을 줄까요? 


 이에 과학자들은 가난과 뇌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능은 언어 습득을 비롯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많은 것들을 효율적으로 습득하게 해 주고 이 과정을 얼마나 높은 효율로 해내느냐가 학업적 성공을 좌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사회 경제적인 지위와 인지 발달 정도

 Columbia 대학교의 Kimberly G Noble 교수님과 Suzanne M Houston교수님의 공동연구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3년 연구팀은 뇌 피질의 표면적, 해마의 크기에 주목했습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가족의 소득 수준뿐만 아니라 부모들의 수학기간 간의 상관관계도 조명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9개 도시에서 거주 중인 1,099명의 아이들의 뇌 피질의 표면적과 소득 수준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 대수 관계(logarithmically)를 이룬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놀라운 점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뇌 표면적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더 작다는 것입니다. 더해서 부모들의 교육 수준과 아이들의 뇌 피질의 표면적 간의 상관관계를 해석한 결과, 선형 관계(linearly)를 나타내며 앞에서 언급한 소득 수준과 마찬가지로 부모들의 수학기간이 길수록 자녀들의 뇌 표면적의 넓이가 더 넓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뇌 피질의 표면적은 인간의 지능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입부에서 언급한 ‘수저 계급론’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추가적으로 연구팀은 부모의 수학기간과 자녀의 해마 부분의 용적 (이 연구에서는 왼쪽 해마의 용적을 비교하였습니다.)을 비교해보았습니다. 결과는 역시나 씁쓸했습니다. 부모의 수학기간이 낮으면 낮을수록 자녀의 해마 용적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뇌의 해마체 부분 역시 학습과 기억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본다면 이 역시 뇌 피질의 표면적 비교 실험과 상통합니다.

 연구팀은 위의 연구결과들을 통해서 가난이 뇌 발달과 학업적 성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물론 보완해야 할 요소들이 많지만 당시에 행해진 가장 큰 규모의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인 지위와 성인들의 인지 능력

 가난은 성인들의 인지능력에도 영향을 줍니다. Warwick 대학교의 Anandi Mani 교수님은 성인의 소득 수준과 인지 수준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위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30대의 성인남녀들을 대상으로 의사 결정(Decision making) 과제를 수행하여 인지 능력과 그들의 소득 수준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였습니다. 두 개의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실험은 자금(finances)을 연상시키는 의사 결정 실험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를 소득 수준으로 나누어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성인남녀들이 그렇지 않은 실험군보다 인지적 성과(cognitive performance) 정도가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가난한 이들의 인지 용량이 부유한 이들보다 더 감소하는 측면을 보여준 것이죠.

 연구팀은 스트레스가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두 번째 실험을 진행합니다. 농부들을 대상으로 농작물을 수확하기 전과 후의 인지 능력의 차이를 알아보는 의사 결정 실험을 수행하여 비교해보았습니다. 수확하기 전은 가난한 상태, 수확한 후에는 부유한 상태임을 주목하여 이 둘의 차이를 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결과는 전 문단과 맥을 같이 합니다. 가난한 상태의 농부가 부유한 상태의 농부보다 인지 용량과 능력이 더 떨어진다는 결과를 얻은 것이지요. 스트레스 지수가 수확 전의 농부가 수확 후의 농부들보다 높게 나타났지만,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수치들(심박수, 혈압)을 수확 후의 농부들과 같게 통제(Control)한 뒤에 비교해도 여전히 유효한 결과를 얻었기에 스트레스가 인지 능력의 저하를 야기했다기보다는 ‘가난 그 자체’가 이러한 결과를 얻게 한 장본인이라고 연구팀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연구를 통해 얻은 ‘가난이 인지 능력에 주는 영향의 정도’는 하룻밤 수면을 박탈당했을 때, 60세와 45 세간의 차이 그리고  IQ ~13의 차이를 낸다고 언급합니다. 이 수치는 알코올 중독자와 정상인 간의 인지능력 차이와 맞먹는다고 하네요.


결론 그리고 해결의 실마리.

    가난과 지능에 관한 연구는 위에 언급한 두 연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DMN(Default Mode Network)에 대한 연구, 언어와 집행 기능(Executive function)에 대한 연구 등이 이미 이루어졌었으며 현재도 보완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Noble 교수님은 위의 연구의 말미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돈을 공급한다면 인지 결과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후속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 언급하였으며 Mani 교수님은 가난함이 열망(Aspirations)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후속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함은 그냥 ‘돈이 없다.’는 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의 발육, 학습 환경과 위생 상태 등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두뇌 발달에 영향을 주게 되고, 심지어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인지 능력에 짐을 지운다는 것이죠. 즉, 가난이 만드는 수많은 것들에 노출되면 학업적 성취가 떨어지고 이는 차후에 소득 수준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위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해본다면 가난한 이들을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선 경제적 보조와 복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생활수준의 개선뿐만 아니라 인지능력의 복구도 이룰 수 있으며 가난의 되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실제로 Noble 교수님은 최하위 소득층과 그 다음 소득층간의 증가폭이 가장 컸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이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그들을 가난에서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지요.

 Mani 교수님은 가난 구제 정책(Poverty Policy)의 중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노오력’보다는 ‘시스템’을 

 수저 계급론 못지않게 이슈가 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노오력’이지요. 너희들이 가난하고 못 살고 어려운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니 그냥 노력하지 말고 노오–력 해야 한다. 는 것이었지요. 현재는 노력 만능주의를 풍자하는 말로 쓰이고 있고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정말 말 그대로 옛말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수많은 경쟁들에서 승자로 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노오력이 아니라 자보 온이 돼버린 것이지요.

 가난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단지 그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니까요. 수저질을 더 열심히 하라고 하기보다는 밥을 떠먹을 수 있는 수저를 쥐어주는 것.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용의 노오력보다는 개천을 용의 주를 품을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위의 연구결과들이 보여주듯이 말이죠.

Advertisements

글과 생각, 생각과 글.

생각에서 글이 출발하는가,

글에서 생각이 출발하는 것인가.

 

생각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하고

생각에서 비롯되어 글을 쓰기도 한다.

혹은,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글에서 생각이 탄생하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생각이 펼쳐지기도 하고

글로 인해서 생각이 멈추기도 한다.

 

글과 생각,

생각과 글.

 

혹은 언어와 생각.

 

이 둘의 선후관계를 파악한다는건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먼저 멈추기 시작한다면

그 두가지 모두가 흔적만 남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듯 싶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오늘은 꼭 이런 주제로 글을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

하다가 결국엔 아무런 글로 쓰지 못했다.

 

‘하루에 이런 일들이 있었으니,

이것에 대해서 소소하게 써봐도 재미있겠다.’

하면서 메모를 해놓고서는

당시에는 굉장히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핑계들로 책상 구석에 밀어 놓고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말이 안되는 변명들로 인해 잊혀진 글들이

혹은 글로 쓰여질 수 있었던 수기들이 수두룩하게 쌓여버렸다.

그것들을 수습하여 다시 써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버린 뒤에는 전혀 정렬과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순간들이 쓰레기통으로 빨려 들어가버렸다.

놓쳐버린것이다.

 

벼락치기

일을 미루는 거는요,

일을 너무 잘하려는

욕구 때문인 거에요.

완벽주의 때문에 그래요.

 

성장문답 중 윤대현 교수님 편에서 나온 말이다.

처음 봤을 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이해가 되었다.

나는 완벽한 글을 쓰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글을 쓰고 올리면

‘이게 혹시 나쁜 글이면 어떡하지?’

‘더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글을 써내려갈 수 있어야 할텐데…’

하며 쓰고자 하는 글들은 쓰지도 못한 채로

불안해하고만 있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그러게…

그러게 말이다.

 

그 완벽에 대한 강박때문에

글쓰기를 미루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당근과 채찍…?

어느덧 명절이다.

곳곳에서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곳곳에서 충고라는 이름을 가진 채로

참견과 오지랖의 채찍을 받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 말이다.

 

‘넌 언제 졸업할래?’

‘취업하기는 할꺼니?’

‘결혼은 한다니?’

 

….

 

그냥 타이핑을 하기만 해도 손가락이 찜찜해진다.

끈적한 과자를 집어 먹고서 손을 씼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느낌이 들 만큼,

전혀 산뜻하고 기분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걸 전혀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컨데,

채찍이라는 거다.


 

이쯤되니까,

과연 채찍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대로 똑같은 말을 해주면 불쾌해한다는 점이다.

‘나이도 어린게 무슨 참견이냐.’

는 투다.

 

하지만 손윗사람이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그런 말들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뒤에 가서는 짖이기는 말을 되뇌이는 것이다.

‘나 참, 나이가 많으면 다인가?’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이 한창 뜨거웠다.

남자들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인데,

범위를 더 넓혀볼 수도 있을것 같다.

 

남자와 여자의 문제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이다.

 


 

그저 당근을 주었으면 좋겠다.

말을 앞으로 가게 하는 데에 더 효과적인 것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일지도 모른다.

 

당근을 진행방향에 계속해서 두면

그 곳으로 더 빨리 나아가고 지치는 것도 덜하다.

 

채찍을 준다면

그저 채찍이 있는 곳을 피하기 위해서

단지 ‘그 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싶을 뿐이지

어떤 지향점을 잡고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다치고 지친다.

 

채찍을 휘두를 때에는

채찍을 쥔 자만이 휘파람을 분다.

 

우리는 당근을 쥐어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명절때라도…


 

종교가 없더라도, 종교가 있더라도.

저명한 과학 저널인 Cell지의 자매지인 Current Biology 2015.11.16일자(Online _ 2015.11.05)에 흥미로운 연구결과 하나가 기재된다.

dd

 

The Negative Association between Religiousness and Children’s Altruism across the World.

 


발번역해보자면, ‘전 세계의 어린이들의 이타심과 종교간의 반비례 관계,’ 정도 되겠다. (물론 이 반비례가 엄밀한 의미의 반비례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보통 이타심이라는 특성은 10세 이전의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기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과 범국가, 범문화권을 대상으로 했다는 연구라는 점에서 흥미롭고 기존의 연구결과들이 가지는 한계점들을 보완했다고 할 만 하다.

결과만을 이야기한다면 보다 더 종교적일수록 도덕적일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종교가 있다고 해서 더욱 이타적인것도 아니고 종교가 없다고 해서 더욱 이기적이라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실험 결과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사항들은 아래의 링크에…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A2%85%EA%B5%90%EC%A0%81%EC%9D%BC%EC%88%98%EB%A1%9D-%EB%8D%94-%EC%9D%B4%EA%B8%B0%EC%A0%81%EC%9D%BC%EA%B9%8C

: 사이언스타임즈에 실린 관련 기사

http://www.cell.com/current-biology/abstract/S0960-9822(15)01167-7

: 원문 링크

 

위와 같은 연구도 그러하고 신경과학, 인지과학 등의 영역에서는 종교의 탄생, 종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Model등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이어왔었다.

http://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1364661313000764

: 2013.6월자 Trends in Cognitive Science에 실린 Explaining the Moral religions.

 

이런 가운데에서 위와 같은 연구결과는 흥미롭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물론, 종교가 선함에 악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리다. 허나, 선함에 종교가 도움을 준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