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rophone Fiend.’ Rakim.

(http://theshho.com/)

Intro.

내가 처음 힙합을 들었던 순간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뚜렷한 순간은 있다. 고2 때 9월 모의고사를 치루었는데, 수리영역에서 역대 최하의 점수를 기록했었다. ‘열심히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험을 못 쳤지?’, ‘난 왜 이렇게 멍청하고 못 난거지? 나도 잘 하고 싶은데… 미치겠다.’ 같은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찼고 자괴감과 절망감이 따라왔다.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는데 시험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러다가 접한 노래가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 Drunken Tiger(Feat. T, Dynamic Duo)’ 였다. 시험은 내가 망쳐놓고서 ‘승리는 나의 것, 복수는 나의 것’ 구절을 들으면서 분노의 감정을 선순환(?) 시켰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노래에다 눈 흘기..)

(Drunken Tiger –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그런 이유로 듣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격하고 가사가 거칠고 날이 선 노래들을 찾아 들었다. Eminem, DMX, 2Pac, N.W.A 등등의 노래들, 그 중에서도 비트가 쎈 것들을 골라서 듣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 Eminem-Kill You였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살의와 분노로 가득차있는 곡이다. 이 노래로 영어로 할 수 있는 험한 욕은 거의 다 배웠다고 해도 무방할지도...) 한국 힙합도 비슷한 것들만 찾아 접하다보니 힙합은 당연히 이렇게 분노와 자기 과시, 가짜들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거친 언어들을 비트에 얹어서 전달하는 노래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노래들의 가치가 낮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다가 Rakim을 접하게 되었다.

Rakim A.k.a Rakim Allah

우리나라에 Rakim 알려지게 된 건 Drunken Tiger의 ‘Feel Ghood musik’의 Monster 리믹스 버젼에 참여하게 된 계기겠지만, 내가 Rakim을 처음 듣게 된 건 ‘The 18th Letter’ 앨범이었다. 수능을 본 직후였다. 발매되었던 때가 1997년도였으니 발매된지 12년 후에서야 듣게 된 것이었다.

The 18th Letter _ The Book Of Life

(Rakim – The 18th Letter/The Book of Life Album Cover)

인터뷰 내용들을 따서 만든 Skit들과 곡들을 합해 13곡으로 이루어져있는 이 앨범은 내가 들어오던 힙합과는 참 많이 달랐다. 소위 ‘올드 스쿨’이라고 불리는 비트에 묵직한 Rakim의 랩이 더해진 작품.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하루 종일 들었다.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들었다. 그리고는 인터넷에서 가사집을 찾아 들었다. 그제서야 Rakim의 랩에서 느껴진 다른 점들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작이었던 ‘The Master’를 이어듣고 Eric.B와 함께했었던 명작 ‘Paid in Full’까지 빠짐없이 들었다.

(Eric B. & Rakim – Paid in Full)

그가 가진 매력은 바로 가사에 있었다.

일단 F word나 N word가 극히 적다.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처음에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분명 힙합인건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거친 언어들을 쓰지 않고서도 랩을 하는 구나.’ 하며 생경한 느낌을 받았었더랬다. 그런데도 듣기에 좋았다. 너무 좋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렇게나 좋을수가?!’였다. 무디면서도 묵직하고 차분하게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더 빠져들게 된 건 가사를 보며 들었을 때였다. 다른 MC들도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해서 가사를 썼지만 Rakim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사용하는 어휘의 범위와 종류가 넓었고 다양했고 그 내용이 하나의 장면을 연상시킬만큼 짜임새가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말들을 쓰다보면 중구난방으로 좀 빠질 수도 있을 법 한데 Rakim은 그런 경우도 적었다. (심지어 Rhyme tight의 교과서 급이다.) 그가 데뷔할 때에도 다른 아티스트들과는 다르게 세련되었고 지적이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힙합은 결국 욕하고 돈자랑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편견을 깨준 아티스트가 바로 Rakim이었다.

(실제로도 힙합은 욕하고 돈자랑이 다라는건 잘못된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해주는 웹툰 Black out )

MC는 거리의 시인이라고들 한다. 난 이 말이 일명 ‘힙덕심’이 과잉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이 명제에 Rakim은 참이다. (실제로도 그는 시인을 또다른 업으로 삼고 있을 만큼 뛰어난 작사, 작문력을 가지고 있다.) 리릭시즘(Lyricism : 노래의 가사, 시 등에 쓰이는 단어의 질 또는 그걸 가장 중시하는 주의)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람때문이 아닐까 싶다.


(Rakim – It’s been a long time. 가사해석)

When I float at night, I show em new heights, I go to write
밤이 되면 난 떠다니면서 새로운 기준을 보여주고, 작사하러 가

They know I strike with new prototypes to blow the mic
누구나 내가 마이크를 공격할 새로운 모범을 제시한다는 걸 알지

Critics and biters, don’t know where my source of light is
비평가와 안티들, 나의 빛의 근원이 어디있는지 모르는거야

Still leave authors and writers with arthritis
그래도 작사가들에겐 관절염을 안겨주고

Cursed kids like the Pyramids when they found the style
스타일을 찾아낸 아이들을 피라미드처럼 욕했어

First to ever let a rhyme flow down the Nile
최초로 라임을 나일 강에 흘려보낸 사람

The rebirth of hip-hop’ll be dropped now
이제 힙합의 부활이 다가와

Rakim-It’s been a long time 중에서

출처 – 힙합엘이

지금 힙합이 가사를 쓸 때에 라임을 설계하고 플로우를 짜는 방법론을 그가 거의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다가, 데뷔 앨범이었던 ‘Paid in full’은 힙합의 역사에서 ‘명반 리스트’를 뽑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앨범들중 하나다.  Sophomore jinx(소포모어 징크스 : 아티스트가 1집을 너무 잘 만들면 2집에서는 망한다는 징크스.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Nas형…)는 Rakim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Sophomore ‘Peak’ (!!!)라는 평가를 받고 힙합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꾼 2집 ‘Follow the Leader’를 발매해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 이후에도 솔로 커리어를 쭉 이어가 (Seventh Seal은 쫄딱 망했지만…) 살아있는 전설로 등극한다.

너무 Rakim을 예찬하는 거 아니냐?

라고 하겠지만, 이건 나 뿐만이 아니다. 그가 데뷔한 1987년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구, 신인을 막론하고 모든 힙합 아티스트들은 가사에서 그를 언급하고 그의 노래를 샘플로 써 작곡하고 인터뷰에서 직접 그에게 존경을 보낸다. 심지어 요즘 가장 뜨거운 신인인 A$AP Rocky의 본명은 ‘Rakim Mayers’이다. (Rakim의 이름을 따서 만든게 맞다.)

Me? I’m a product of Rakim, Lakim Shabazz, 2Pac N-
나? 나는 Rakim, Lakim Shabazz, 2pac, 
 
-W.A, Cube, hey, Doc, Ren, Yella, Eazy, thank you, they got Slim
N.W.A., Ice Cube, Dr.Dre, MC Ren, Yella, Eazy-E의 산물, 고마워, 저들에겐 Slim이 있어
 …
Eminem – Rap god 중에서.
(출처 – 힙합엘이)

….

I ain’t serve no pies, I ain’t slang no dope
난 약을 운반하지 않아, 약을 팔지도 않아
I don’t bring no lies, niggas sang my quotes
난 거짓말하지 않아, 놈들은 내 가사를 따라 부르잖아
I don’t play no games, boy I ain’t no joke
이건 게임을 하는 게 아니야, 인마 난 장난이 아니야
Like the great Rakim, when I make my notes
마치 위대한 라킴처럼, 내가 글을 쓸 때는
You niggas might be L or you might be Kane
너희가 Big L이거나 Big Daddy Kane이거나
Or you might be Slick Rick with 19 chains
19개 체인을 건 Slick Rick이거나
Or you might be Drizzy Drake or Kendrick Lamar
아니면 넌 Drake이거나 Kendrick Lamar라고 해도
But check your birth date nigga, you ain’t the God
너의 생년월일을 체크해봐 인마, 넌 신이 아니야
Nah you ain’t the God
아니지 넌 신이 아니야
Nigga, Cole the God
인마 신은 J.Cole이지
January 28th
1월 28일생
J.cole – January 28th 중에서.
Rakim은 January 28, 1968에 태어났고, J.cole은 1985년 1월 28일에 태어났다.
자신과 Rakim이 생일이 같고 Rakim은 신(Rakim Allah)이므로
자신이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ㄷㄷㄷ)
(출처 – 힙합엘이)
Yeah, what, what, yeah
Shout out the 18th letter, you know?
앨범 ‘18th letter‘에 존경을 표할께, 그 앨범 알지?
Word up… we gon’ do it like this
분명히 해야해, 우리는 이 앨범처럼 해나가야 한다고.
And pay homage to the most livest
그리고나선 이 개쩌는 결과물에 대해 존경을 표해야 해.
Raekwon – Rakim Tribute(Feat. MC Ultra)
출처 – Genius
(Raekwon도 존경받는 Wu-tang clan의 일원이다. 그런 그가 Rakim 헌정 곡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그가 힙합에서 가지는 입지를 쉽게 알 수 있다.

MC means ‘Move the Crowd.’

최근에 그는 Montreality와 인터뷰를 가졌다.

(Rakim interview by MONTREALITY On April, 27th 2015)
J.cole과 Kendrick Lamar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에 대한 자신의 견해 등을 말한 그는 이런 말도 한다.

This is one of those albums where I can have fun. My last album, The Seventh Seal, was somewhat of a conscious album. I wanted to made a statement on that album.

무슨 말인가 하고 조금 더 들어보니 ‘새 앨범을 현재 작업중에 있고 2015년 중순 혹은 말에 발매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산으로 멈추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존경은 요구하는게 아니라 벌어서 얻는 것이라는 걸 몸소 보여준다.

(이번엔 정말 기대할께요!!!)

1968년에 태어나서 1985년에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남들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것을 키워나가자고 말하는 자칭, 타칭 God MC. 그는 여전히 내게는 가장 훌륭한 MC이고 힙합의 모범이다. 앞으로도 그의 가사와 음악을 오랫동안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급하게 마친다.

P.S 위키피디아에 기재된 그에게 표해지는 음악적 존경들.

  • 이스트 사이드 랩퍼들을 디스하던 2pac이었지만,그는 라킴만은 ‘올드 스쿨’에 대가라고 칭했다.
  • 우 탱 클랜에 맴버 랙원은 2006년에 발매한 그의 믹스테잎에서 Rakim Tribute라고 말했다.
  • 50 Cent는 더 게임과 같이 부른 ‘Hate It Or Love It’에서 그의 Hook 부분 가사 ‘Daddy ain’t around, probably out committing felonies/my favorite rapper used to sing Ch-Check out my melody’는 에릭 비 & 라킴의 히트곡 ‘My Melody’의 한 부분이다.
  • 더 독 파운드의 전 맴버였던 커럽은 스눕 독의 데뷔앨범 ‘Doggystyle’에서 “Who’s jokin’? Rakim never joked, so why should I loc? now that’s my idol….” 라고 하며 거론했다.
  • 에미넴또한 자신의 곡 ‘I’m Back’에서 ‘라킴의 곡 ‘My Melody’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거론했고, “The Way I Am”에서는 Rakim의 “Master”라는 노래의 Hook 부분인 “I’m the R, the A, to the KIM. If I wasn’t then why would I say I am?”를 차용했다.
  • 우 탱 클랜의 맴버인 고스트 페이스킬라또한 ‘The Older God’이라고 그를 칭했다.
    Jay-z는 ‘Blue Magic’에서 Eighty-seven state of mind that I’m in/I’m in my prime so for that time I’m Rakim.”라고 말했다.
  • 우 탱 클랜의 맴버 RZA는 “who could master the rhythm to which rakim got”이라고 그의 마지막 트랙에서 말했다.
    나스는 ‘ Street’s Disciple앨범에서 라킴의 생애,음악을 “U.B.R. (Unauthorized Biography of Rakim)”라는 곡에서 표현했다.
  • 더 게임은 ‘Da Shit’이라는 트랙에서 I’m the West Coast Rakim, got niggaz blocked in.”이라고 말했다.
  • 영화배우 겸 랩퍼인 윌 스미스는 라킴을 진짜 힙합아티스트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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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자, 차별을 차별하는 자.

(옹달샘 3인 _ 출처 : 오마이스타)

 

한동안 옹달샘과 일베 그리고 여러 글, 논쟁 덕분에 화제가 된 단어. 바로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이다. 장동민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여자들은 멍청해서 남자들에게 지능으로는 따라오지 못한다는 발언을 했고, 일베는 모두가 알다시피 ‘김치년’ 등의 단어로 ‘여자들은 물욕만 많고 남자를 호구 혹은 지갑으로만 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거침이 없는 집단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쌓이다가 장동민이 식스맨 후보에 오르고 모두의 이목을 집중된 순간, 팟캐스트에서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비하, 혐오에 대한 반발에는 ‘열폭’이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설마, 너 페미니스트냐?’ 라고 공격적인 뉘앙스의 질문을 하기도 한다. (마치 페미니스트는 남성의 안위를 위협하는 존재 혹은 남성의 탈을 쓴 여성이라고 상정하는 듯하다.)대체 페미니즘이 뭐길래?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한 번 페미니즘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이러하다.

여성주의(女性主義, 페미니즘, 영어: feminism /ˈfɛməˌnɪzəm/)은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 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이다.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여성운동가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칭하였다.

(출처 _ 위키백과)

여성 우월주의라는 비틀린 페미니스트들을 제하면 결국 ‘남성 반대’가 아니라 ‘비차별과 ‘양성평등’을 옹호하는 것이다. 남자 혹은 여자라는 틀에 한 인간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본성에 기인하는 차이를 인정하되 이로 인해 차별이 생기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결국 ‘페미니즘’ 아닌가? 여성참정권 운동은 19세기 중반에서야 시작되었다. 그 말인즉슨, 선거권에서든 다른 면에서든 인류 역사에서 여성들은 최근까지도 억압받아왔다는 것이다. 그 차별에 대해 싸우는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나 남성에 대한 적대감과는 결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부당하다. 오히려 그 공격들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 여자들이 그러던데? 사실인데 어쩌라고?’

 (이 말을 듣을 때, 대략 나의 심정)

[차별은 종교, 신분, 학력, 효력이 없어진 전과, 성별, 성적 지향, 인종, 신체 조건, 국적, 나이, 출신 지역, 이념 및 정견 등의 이유로 고용, 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 임금 및 수당지급,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에 있어서 특정한 사람을 우대, 배제,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고,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0조 제1항에 기술되어있는 내용이다. 한 사람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별’하고 ‘배제’하고 ‘불리하게 대우’ 하는 것은 법으로도 옳지 않을 뿐더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저 말은…

Romuald Bokej, CC BY SA

(출처 _ Romuald Bokej)

여성 차별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성 차별’이기 때문이 나쁜 것이 아니라, 여성 ‘차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받는 건 폭력이다. 인종차별에 대해서 (특히 아시아인들이 백인들에게 비하당할 때) 큰 목소리를 내면서 여성차별에 대해 침묵하는 건 ‘차별에 대한 차별’이다. 동성애 혐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종교에 대한 혐오는? 지잡대를 나왔다고 무시하는 학벌주의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재산의 정도로 차별하는 건? 한 사람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만으로 그를 판단하는 건? 그렇게나 차별을 차별하고 싶은가?

(물론 이런 분들은 차별…은 무슨 처벌을 받아야 할 …)

부당한 이유로 차별하지 말자. 혐오하지 말자. 단지 자신이 한 편의 우위에 있다고 편승하지는 말자. 차별에 대해, 차별에 대한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도 ‘여자’이시다. 적어도 그 이유때문이라도 조금은 더 신중해지자. 여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 전에. 더해서 누군가를 대할 때도 말이다.

P.S. Manners maketh man. 킹스맨에서 콜린 퍼스가 건달들을 품위있게 후드려 패면서 가르쳤던 진리 아니던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사람이 되자.

삼시세끼 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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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삼시세끼 어촌 편을 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차승원이 차줌마라는 별명을 얻고 제육볶음으로 한바탕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였다. 유해진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와서 푸짐한 식재료를 구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 손호준은 유해진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강아지, 고양이와 놀거나 차승원의 요리나 기타 일들을 거들었고 ‘삼시세끼’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매 끼니를 만들어내는 것은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차승원이 만들어냈다. ‘이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계속해서 보게 되는 맛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역시 나영석 PD가 만들면 다른 건가.‘ 했다. 내 가족들은 나보다 TV를 더 열심히 봤었고 나보다 더 애청자들이었다. 내가 보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푹 빠져있었다. 한번은 가족들이 다 같이 삼시세끼를 모여서 시청했었다. 가족들 모두가 조용히 보고 있는 가운데, 엄마만이 한마디씩을 장면마다 얹었다. 생선을 잡아 오는 유해진을 보면서 ‘아유 저 생선은 비늘이 두꺼운 거면 더 맛있던데.’. 밥을 하는 장면이 나오면 ‘이번에는 밥이 조금 더 고두밥으로 된 거 같은데? 저럴 때는 …’ 하시고, TV 속의 그들이 밥을 다 먹으면 다음 메뉴는 무엇으로 할지를 제일 궁금해하던 것도 엄마셨다. 나는 속으로 ‘우리 엄마는 아는 것도 참 많기도 하지…’ 하고 그냥 넘어갔었더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다 아실 수밖에 없었다. 삼시세끼에서 인물들이 하는 저 모든 것들을 엄마는 그동안 ‘전업주부’라는 이름 아래에 오롯이 혼자서 다 소화하셨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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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삼시세끼의 인물들이 하는 일들을 상세히 살펴보자. 일단 끼니의 식단을 정해서 재료를 구해와서 요리를 만든다. 설거지하고 청소를 하고 다음 끼니는 무엇을 먹을지 생각해서 바로 준비를 해야 한다. (사실 방송에서 메뉴는 PD가 정해준다. 이렇게 정해지는 게 오히려 일은 줄어든다) 물론 방송에 관련한 일들도 더 있겠지만, 주요 골자들만 보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집안일을 맡아왔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널리 퍼져 있을 적에는 그 이유로 천대까지 받았었다. 요즘에도 여자가 집안일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과 집안일이라는 일의 가치는 여전히 바깥에서 하는 밥벌이보다는 못하다는 평가를 흔히 받고 있다. 집에만 있으면 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백번 양보해서 그 말이 맞다 치더라도 집안일이 중요하고 어렵고 중노동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가정주부들에게는 이렇게 끼니를 만들고 먹고 치우는 일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집안에 떨어진 물품들은 없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물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를 때, 엄마를 먼저 찾는다) 그 물건들을 사야 하면 남편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때는 혼자 사와야 한다. 남편의 건강과 상태도 챙겨야 하고 맞벌이 부부라면 ‘밥벌이’까지 더해진다. 그녀들은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고 아파도 병원을 다녀오는 것에 대해서도 가족들의 눈치를 본다.

대단하지 않은가? 문제는 더 큰 일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육아’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것도 여자의 몫이다. 더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엄마의 보살핌을 더 필요로 한다. 면역력은 성인보다 더 약하니 아플 때도 잦고 먹는 것에는 더 신경 써야 하며 기저귀도 갈아주고 자식들이 부리는 말썽에 대해 수습도 해야 한다. 잠도 줄어든다. 더해서 그들은 집안을 벗어나기 힘들고 밖으로 나가더라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가까운 곳으로만 나설 수 있다. 전업주부는 절대 만만한 직책이 아니다. 이들이 있기에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밥을 제때에 먹고 청결한 환경에서 잠을 자고 몸을 씻은 뒤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집안일’을 직장 생활과 같은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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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전업주부들이 ‘임금’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자식들이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고 혼인적령기가 되어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떠나는 걸 보면서 허탈해하는 정도는 보통 아빠들보다는 엄마들이 더하다. 직장인인 혹은 직장인이었던 아버지들에게는 직장 동료라도 있지만,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전업 주부 엄마에게는 다시 텅 빈 집안만이 남을 뿐이다. 말벗도 없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만 소리를 채울 뿐이다. 정량하기도 힘든 노동을 했지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들을 호소하면 ‘나도 그랬었다.’, ‘어쩔 수 있겠느냐?’ 등의 일반화를 강요하거나 ‘모성애’라는 말로 소위 퉁치려고 한다. 물론 이 전업주부의 일들은 대부분 상업화가 되어있다. 밥은 식당, 빨래는 세탁소, 청소는 업체 등등. 허나 이 모든 일은 돈을 대가로 내고서 받는 서비스들이다. 그런데 왜 전업주부들은 공짜로 일들을 해야 하는가? 가족이라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은 보상을 받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건 명백한 ‘노동 착취’가 아닌가? 효도라는 건 어쩌면 이런 공허함을 달래주기 위한 자식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전업 주부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주기는 한다. ‘이혼할 때.’라는 게 문제다. 가정 주부는 총 재산의 30% 정도를 할당해주고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50%라고 한다.(XSFM 그것은 알기 싫다. –주부 인프라코어) 허나, 30%. 전업주부의 노동 가치는 부부재산의 반절보다 20%나 낮다. 심지어 GDP를 환산할 때에도 이들의 노동 가치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만약 전업 주부들이 자신의 노동 가치에 대해서 임금을 받는다면 어떨까? 준다면 그녀들은 얼마 정도의 노동가치를 받아야 할까? 그 노동의 강도와 양, 필요성… 이 모든 걸 고려해본다면 말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동안 고생하신 당신의 어머니께서 전업주부시라면 얼마의 돈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매년 어버이날마다 느끼는 빚을 진 느낌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녹아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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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어버이날이 되거나 엄마의 생일이 돌아올 때면, 당신께서는 나에게 돈을 달라고 하신다. 그중에서 절반 이상은 교육 차원으로 그랬던 거라며 돌려주시고 나머지는 그 돈으로 다시 음식재료를 사오셔서 저녁을 만들어주신다. 처음에는 불만스러웠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께는 결국 자식들만 남고 다른 것들에는 아무런 의미가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더해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측도 우리밖에 없는 것이다. 꽃으로 퉁치진 말자. 그건 식상하기도 하고 옳지 않을 것이다.

2014.7.24

(출처 : 뉴스타파 )

그 날의 사고를 접한 건 아침밥을 먹으면서 본 TV를 통해서였다. 속보였다. 커다란 배가 누워있었다. 세월호.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가 불현 듯 떠올랐지만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는 점점 더 기울었고 신고 2시간 20분만에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언론들은 각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셀 수 없이 쏟아냈고 난 그 정보들에 매몰되어갔다. 그리고 18일 오전 11시 50분, 세월호의 뱃머리마저 완전히 잠겨버렸다. 이후 생존자 발견소식은 없었다. 사실상 구조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뒤로 일어난 일들은 살아있는 이들간의 싸움이었다. 유가족들은 청와대로 행진하려다가 저지당했고, 선장에 대한 비난과 다이빙벨, 청해진 해운, 언딘과 해경 그리고 끊이지 않는 추모 집회와 충돌들… 누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고 피하고 유보하는 동안 실종자 가족에서 유가족으로 이름표를 바꿔서 다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출처 : 오마이뉴스)

여름이 찾아오는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가. 유가족들에게, 추모를 위해서 모이는 이들이 갑자기 공격을 받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비극에 슬퍼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다른 관점들을 만들고 자신보다 아는 정도가 적은 이들을 무식한 이들 취급하면서 찍어누르는 과정들을 반복했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의 ‘소재’가 되었고 공감과 위로는 적대적인 말들로 바뀌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시작해야 했고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은 더한 무관심을 겪었다. 어느새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결국 교통사고인데 뭐가 문제냐.’, ‘국가가 사고를 낸 것도 아닌데 뭘?’ 등의 대답들만이 돌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유가족, 그들을 만나고 그 아픔을 그들만이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상실을 겪는 이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이자 측은지심이라고, 진실은 규명되어야 하고 이는 국가의 당연한 책임이고 이를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친구들과 나는 사고 후 100일이 지났던 7월 24일에 무작정 시청으로 향했다.

(세월호 100일 서울 광장. 출처 : 국민TV)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 중이었고 폴리스 라인은 이미 설치가 완료되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이 하늘에,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종이들은 땅 위에 흐드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오가며 모금을 하는 단원고 학생들과 동년배로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시청 광장의 군중들 가장 깊숙한 곳에 유가족들이 계셨다. 모니터에서만 보던 이들의 슬픔이 눈 앞에, 숨결이 닿는 곳에 있었다. 공기보다도 가벼운 단어들 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사람들… 바닷물보다도 쓰고 짠 슬픔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움을 목놓아 부르짖던 목소리에는 지옥이 있었다. 우리는 일어나서 그 슬픔들과 광화문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나‘라는 개인 하나가 참여했다는 것 뿐인데 큰 변화를 느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보폭은 더 넓어졌다.

하지만 중간 즈음에 다다랐을 때, 나는 혼자 근처 지하철역으로 빠졌다. 가족들에게 저녁식사시간에 맞춰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두 발은 역 방향을 향했지만 두 세걸음마다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 인도 쪽을 걷던 (행진은 차도를 따라 이루어졌다.) 아저씨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아버지 뻘은 되어보였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해라. 지겹지도 않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열심히 공부나 할 것이지 말이야.”

오른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를 쏟을 정도로 격한 삿대질까지 섞으며 이런 말들을 계속했다. 이윽고 행렬에 있던 3,4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맞받아쳤다.

“그만 둘 수 없어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고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 아저씨는 목을 쭉 뻗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네 아주 잘났다. 이따구로 불편하게 하면서 잘 되나 두고 보자 X발”

그리고 그 아저씨는 오른쪽으로 꺾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깐의 웅성거림이 끝나고서 행렬은 행렬대로 행진을 계속했고 다른 사람들도 다시 이어폰을 꽂고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멀어지는 동안, 나는 그 곳에서 잠깐 멈춰섰다. 구호가 몇 번 거리를 따라 울려퍼지고 이윽고 행렬의 끄트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뒤돌아 다시 행렬에 합류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 걸었다.

 광화문에는 인도를 따라서 경찰버스들이 머리와 꼬리를 붙여 벽을 만들어 놓았다. 인도에서는 광장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종종 지나가는 마을버스에서는 조롱이 흘러들어 나왔고 형광색 옷을 입은 경찰들과 시위대의 거리는 더 좁혀졌다. 유가족들의 한숨에 더욱 굵어진 빗방울이  팔뚝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보다 더 앞서서 가던 행렬에서 경찰과의 말다툼이 일어났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일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곧장 경찰을 향해 달려갔다. 몇몇 사람들도 둘을 향했다. 그 움직임을 본 경찰은 바로 물러났고 우리를 경계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일 것 같은 청년이었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크게 뜬 눈에는 공포가 느껴졌다. 나는 그 때 그들에게 무엇이었단 말인가? 시위대는 오히려 그들에게는 괴물이었고 적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자정이 넘어 돌아왔지만 지친 몸은 복잡한 머리 덕에 잠들지 못했다.

나에게 세월호는 2014년 7월 24일,

이 때를 전후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출처 : 연합뉴스)

시위는 끝나도 유가족의 시간은 여전히 4월 16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 다다음 시위가 계속되어도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나에게는 한 표의 권리가 있고 의견을 표명할 힘도 있었고 시위를 하고 그들의 통곡에 같이 울어줄 몸이 있었지만 그 뿐이었던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감정이지만 나의 일은 아닌 듯, 나의 할 일은 세월호 참사 전부터 마련되어 있던 일상뿐이었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여기까지인건가?‘ 하는 물음은 답없이 말꼬리를 이어갔다.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에 가라앉은 채로 새해가 밝았고 한 달 그리고 두 달….

(출처 : 미디어몽구)

2015년 4월 2일. 유가족들은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는 노란 천위로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물을 떨구었다. 유가족들도, 유가족의 머리를 밀던 이들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이들도 울음을 토했다. 그 울음을 토하던 이들을 유가족들이 안아주었다. 난 그 장면을 처음 사고를 접했던 때처럼 먼 곳에서 그저 목격했다. 생각없이 웃다가도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연거푸 숙였다. 땅이 보이고 발 끝이 보일 때까지 숙였다. 그리고 그 날 꿈에서 난 광화문을 향해 다시 걸었다. 안개가 가득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비닐을 덮고 있던 머리를 민 유가족분이 이슬을 털고 일어나 내게 말했다.

“오랫만이에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출처 : 오마이뉴스)

그 한 줄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질문을 들은 난 다급히 잠에서 깼다. 대답할 수 없었다. 답할 말이 없었고 답할 염치가 없었다. 그 동안 난 대체 어디에 있었나. 무얼 하고 있었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었나. 무력함을 핑계로 놓은 두 손은 얼마나 가벼웠던가. 난 그들을 얼마나 잊고 있었는가. 아, 이 얼마나 비겁한 인간이란 말인가…

(출처 : 금강일보)

그러던 와중 세월호 1주기 전날 밤, 카이스트에서 ‘세월호를 읽다.‘ 라는 행사가 열렸다. 저 곳에 가면 나와 같은 이들이 있는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비겁하지만 위로와 힘을 얻고자 했다. 사고가 일어났던 1년 전부터 삭발한 유가족까지 이어진 사진들과 그들의 입에서 나오고 귀로 들어온 수많은 글들을 천천히 행사주최자들이 읽어갔다. 사람들은 조용히 들었다. 울음이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틀린 것인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모른 상태로 헤메는 동안 1년이 지나버린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왔기에 비극이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을 그렇게 얻었다. 그제서야 나는 분향소에 갈 용기를 얻었고 추모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눈에 한 명 한 명 새겨 넣었다.

(출처 : 연합뉴스)

죽은 이들은 말 없이 산 사람들에게 슬픔과 상실을 준다. 그 아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건 죽은 이들이 아니라 또 다른 산 사람들이다. 눈물과 그들을 보듬어줄 두 손과 품이 있고 체온이 식지 않은 건 우리들이다. 산 사람들의 눈물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위로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건 상실을 겪은 이들과 같이 사는 이들, 우리들만이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잊지 않고서 함께 하고 계속해 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싹 틀수 있다고 나는 믿기로 했다.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들의 조롱받는 슬픔이 다할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