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 감상문 : [소수의견] 정의의 여신은 과연 눈물을 흘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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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소수의견]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소수의견’에 대한 보도자료들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같이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용산 참사 사건이다. 철거민들과 용역, 경찰들이 얽혀서 만들어낸 비극. ‘국가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드러낸 그 사건. 허나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책 소수의견의 저자인 손아람 작가와 감독 김성제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작품에 용산 참사는 하나의 ‘모티프’일 뿐이다. 절대 용산 참사에만 국한된 작품이 아니다.

분명 용산 참사와 이 영화간에는 상동하는 부분은 존재한다. 허나 영화 ‘변호인’이 부림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영화라는 점과는 대조되지만 영화 소수의견이 용산 참사를 토대로 해석되기 쉽다는 것을 제작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써진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 영화는 그저 하나의 ‘픽션’이라는걸 제작자들은 강조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되는 건 용산 참사와 연관시켜서 말을 돌리는 것 아닐까? 그들은 이 작품이 그저 용산 참사 프레임에 갇혀서 공분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하나의 실화에 국한된다면 확장은 제한된다. 그렇게 되면 구조는 단순해지고 감상은 쉬워질 것이다. 더해서 감정의 폭은 넓어지고 강렬해지지만 깊고 길게 기억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카타르시스는 ‘해소’이지 ‘인식’이 아니다. 혹자들에게는 아쉬운 이야기이겠지만 영화 소수의견은 카타르시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 ‘불완전함’으로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

미리 말하자. 난 이 영화를 정말 높게 평가하고 싶다. 힘을 조금 더 실어보자면, 근래에 접한 한국 법정 영화들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하고 싶다. 정말이다. 미장센이 어마어마하게 대단하다거나 신들린 듯한 배우들의 연기 혹은 원작을 훌륭하게 영화로 재현해냈다 등의 이유가 아니다. 어설프게 정리해본다면 ‘불완전함’으로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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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수의견의 인물들중에서는 성품이 완벽하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행동만을 골라서 하는 이들이 없다. 다시 복기해보자. 숱하게 나왔던 부당하지만 절대적인 강자들에게 대항하는 정의롭고 약한 주인공들. 개인적으로 이들을 통해 빚어낸 법정 영화, 드라마들은 뚜렷한 법정 장르를 만들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 그 많은 작품의 결론이 ‘법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이 귀결이 정의로운가 아닌가?’ 더해서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향해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너 잘했어요? 잘못했어요?’, ‘얘네 인간적으로 벌을 받아야해요? 안 받아야해요?’, ‘그러니까 이런 저런 법을 근거로 벌해야겠네요!!’ 이런 식이다. 즉, 법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귀결되고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는 사견이니…)

으아 땅땅땅 !!

이 영화는 그런 노선에서 벗어난다. 검사측과 변호인측이 모두 도덕적으로 완벽한 혹은 부패한 인물들만 있지 않다. 이들은 각자의 입장과 승리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 선을 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사건 자체와 인물들이 처하는 상황들이 딜레마의 연속임에도 대립 구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법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원고와 피고가 나뉜다. 원고는 꼭 이래야하고 피고는 꼭 저래야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도 사람이다. 관념적인 특성에 현실을 맞추는 클리셰를 소수의견은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사의 톱니바퀴는 삐걱거리지 않고 나름 잘 굴러간다. 그들의 싸움은 공판의 승리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 사소한 듯 하면서도 큰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가능성을 만들었다.

  • 변호사 ‘윤진원’과 배우 ‘윤계상’의 성장.

이 영화.  출연진들이 나름 빵빵하다. 유해진, 김옥빈, 이경영, 김해효 등등… 검증된 신예부터 베테랑 배우들. 허나 폭 넓게 배치된 라인업들의 장기말 싸움에서 내게 가장 돋보였던건 윤계상이었다. god의 윤계상이 고군분투한 그 결과, 그는 매우 뛰어난 배우가 되었다. 분명히 그는 성장했다.

그런 그가 연기한 변호사 윤진원도 영화안에서 성장해간다. 위에서 법정 영화 이야기를 줄곧 해댔지만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상 성장담이다. 조금 더 잔혹한 법정 미생이라고 해야할까. 로펌을 어디로 들어갈 수나 있을지 궁리하며 원서를 이곳 저곳에 넣으며 고군분투하는 이미지는 취준생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비정상적인 법조인들과 그들의 생리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도 수긍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설정한 방향성을 그는 지켜내지 못한다. 차를 수리하다가 몽키스패너를 집어던지고 차도를 가로지르듯 방황을 거치고 부딪히고 좌절을 겪는다. 남들이 다들 그렇듯이 말이다. 물음표로 점철된 그 끝에 다다를수록 보다 더 단단해지는 그를 보게 된다. 입장이 바뀌는 그에게 성질이 나기보다 차분하게 지켜보게 된다.

  • 피해자, 피의자, 검사, 변호사, 판사 그리고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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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법정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헌데, 지금까지 봐온 바에 따르면 많은 작품들에서 그려진 모습은 단순한 ‘메신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규칙과 역학을 가지고 돌아가고 그 결과의 여파는 어마어마한데도 말이다. 수도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던 이들을 정면으로 내세워 조금이나마 다루었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저, 이 기사 씁니다.’

김옥빈이 분한 기자 수경이 뱉는 주요한 대사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똑같은 대사를 하는데 그 기사가 가져오는 결과가 사뭇 상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이 국민재판에 대해 여론을 부여하고 규모를 키우는 일종의 순기능을 발휘하지만 후반부에선 되려 그 사건을 불리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에 일조해버린다. 왜곡 보도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수경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저 기자에요.’

변호사 진원이 수경에게 기사를 쓰지 말라고 말리자 그녀가 답한 말이다. 그녀는 기자다. 기자는 언론에서 기사를 쓴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녀는 그 정보가 기사로 다루어져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자는 항상 알 권리와 그 외의 항목들 사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그녀는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들을 잃은 박재호(배우 이경영)를 살릴 수 있는건 언론이 아니라 법정이라고 한 진원의 말도 맞는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언론은 언론이다. 그 양면성마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기자는 미안해하는 순간, 기사를 못 쓰는 법이에요.’

  • 물론, 옥에도 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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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칭찬을 늘어놓았으니 아쉬움도 몇 자 적어보자. 초반부에 기자 수경과 변호사 진원이 대화를 하다가 법률 용어가 나오자 갑자기 어색하게 설명구도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아, 기자님.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면서 대사를 주고받는 그 부분은 정말이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싹둑 흐름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오글거리는 설정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이해는 간다. 법정 영화에서 법정 용어들은 다뤄지지 않을 수가 없다. 허나 관객들은 대부분 그 의미를 모른다. 감상에 이런 걸림돌에 한 번 넘어지면 몰입도는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방지하고자 처음에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에서 처럼 코드 네임을 분별하려다가 엔딩을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벙찐 상황이 벌어질테니 말이다. 그래도 아쉬운건 아쉬운 거다.

조금 더 걸고 넘어져본다면 미장센이 좀 부족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영화로 만들어진 이상, 미장센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 두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아들을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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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도 눈물은 있답니다.’

검사측에서 ‘치사죄’를 설명하면서 덧붙인 말이다. 의경이었던 아들은 잃은 아버지와 철거민인 자신의 아들을 경찰때문에 잃은 아버지는 법정에서 증인석과 변호인석 옆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둘은 역설적이게도 법적 입장이 다름에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이다. 둘은 결국 눈물을 흘린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속에서 나는 썩은 내는 십리 밖에서도 진동을 한다고 했다. 무엇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명확하게 모른 채 느끼는 아픔에 대한 슬픔이 아닐까. 결국 아픔과 죄는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다.

법은, 정의의 여신은 과연 눈물을 흘리는가?

어느 쪽이 소수의견이었으며 그들에게 법은 어떤 표정이었는가?

국가는 여기에 어떤 잘못이 있었고 어떤 책임이 있었을까?

두 아버지의 비극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마지막 그리고 광화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전관예우를 받은 주제에 주인공앞에서 유세를 떨던 부패한 검사. 왠지 올곧았던 진원과 이혼변호사였지만 깊숙한 곳에 정의감이 남아있던 변호사 대석(배우 유해진)의 연장선상 끝에 있는 존재같았다. 모든 법조인들이 처음부터 부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위 ‘꼰대’도 아니었을 것은 자명하다. 법과 정의를 다루면서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인마!’ 하면서 타협을 입에 담는 모순을 범하게 된 그들이 기득권층이 되고 시스템을 자신들을 위해 악용하면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철거가 결국 다시 진행되는 장면에 이어 보여줬던 그 마지막 장면, 진원이 그 검사의 명함을 냉소와 함께 버리던 그 장면에서 난 꼰대에 대한 감독의 환멸을 느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P-type의 광화문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그냥 불현듯말이다.

이 구절이 그렇게 맴돌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이 노래로 이번 감상문을 마친다.

[Verse 3]

투박한 일상과 온종일 싸운 뒤에 느낄 거야, 내일도 널 욕보일 삶
현실에 대한 답 중 선택은 착각쯤 되나?
일상과 이상과 세상 사이엔 늘
못 갖춘 수많은 자격들… 너도 뭐 차차 겪을 거야
오늘 자 기억들, 곁들인 건 소주 한 잔의 반가운 해방감
나의 밤관 상관없다 방관한 타인의 삶
반강제로 수긍한 이 시스템
시스템 위에 시스템이 낳은 시스템
권력이 거리에 미메시스된 피라밋 같은 건물들
그 속에서 곧 물들거나 늙을 어린아이였던 속물들
귀찮아도 눈을 떠, 삐걱대면서 버텨
과연 이러는 게 똑똑한가?
하루는 비참하고 다른 하루는 비겁해
오늘 난 옛날의 나에게 떳떳한가?

  • P.S

이 영화를 검색해보면 소수의견(2013) 으로 결과가 나온다. 왜 그럴까? 실제로도 영화에 등장하는 서류들을 보면 년도가 모두 2013년도로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은 이 영화를 2013년도에 이미 다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개봉이 늦춰지고 또 늦춰졌다고 한다. 이번 년도에 와서야 마침내 개봉하게 된 것인데 글쎄…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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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 감상문 : [매드맥스] 미쳐버린 세상에서는 정신줄을 잡아야 산다.

이 글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뒤늦게) 들어가면서…

매드 맥스는 근래에 들어 본 영화중에서 가장 무식한 듯 빈틈없이 본 영화다. ‘오리지널 시리즈 조지 밀러 감독’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보지 않는다면 매드 맥스가 본래 ‘시리즈물’이었다는 걸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전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감상이 가능하다. 포스터와는 달리 미친놈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희망없는 세상. 샤를리즈 테론과 니콜라스 홀트에 대한 재발견을 할 수 있었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였다.

  •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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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시궁창. 바야흐로 핵전쟁이 발발하여 떡실신에 이른 22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모든 것이 먼지와 모래로 되어버린 세상에서 물과 음식 그리고 기름은 살아남기 위해서 가져야하는 필수품이자 힘을 위한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 (사실 세기말이 아닌 현 세계에서도 저 논리는 통용된다. 단지 정도의 차이겠지만…)

 나는 제3차 세계대전에 어떤 무기가 사용 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4차 세계대전에선 몽둥이와 돌멩이로 싸우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여러 도구들로 싸움을 이어간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다룬 작품은 매드맥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핵폭탄의 개발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잠수함 발사형(SLBM) 등등의 개발로 인해 핵전쟁에 의한 인류와 세계의 멸망은 더이상 허무맹랑한 공상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가능성으로 오래전부터 다가왔다. 그러자 사람들의 머리속에서는 ‘만약 핵전쟁이 발발한다면…’에 대한 상상이 자리잡았고 이는 글과 이미지, 영상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파급력과 몰입도가 가장 높은 작품은 단연 ‘게임’이었다. 그 게임들중에서도 가장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단연 ‘폴아웃’ 시리즈일것 같다.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인듯)

폴아웃 이미지 2

게임 폴아웃3 중에서

매드맥스를 처음 봤을 때에 바로 ‘폴아웃’이 떠올랐다. 일단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총질’을 한다는 점과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있다.

War. War never changes. – 폴아웃

매드맥스에서도, 폴아웃에서도… 핵전쟁이 끝난 이후마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이어가지만 매드 맥스와 폴아웃은 다른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인물’이다.

  • Max, My name is 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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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하디가 분한 맥스는 마초적이며 과묵하다. 정신나간 세상에서 그는 트라우마와 싸우고 자신을 해하려는 적들과 싸우며 끊임없이 자신을 엿먹이는 세상과도 싸운다. 그 누구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쉽사리 다른 사람들을 믿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훨씬 강하다보니 어느 정도는 헤쳐나가지만 결국 곤경에 처하고 만다. 그러다가 만난 여자 캐릭터와 협력하고 신뢰관계를 쌓아가며 자신의 적들을 가차없이 부순다. 한 마디로 고독한 츤데레 먼치킨 마초?

익숙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로 떠오로는 인물들. ‘신시티’의 남자들과 맥스는 참으로 닮아있다.

신시티 포스터

처음에는 하티건(브루스 윌리스)이 바로 떠올랐지만 맥스는 그보다 더 냉철한 캐릭터이다. 마브(미키 루크)? 드와이트(클라이브 오웬)? 맥스를 특정 캐릭터에 대입할 수는 없지만, 신시티 캐릭터의 공통분모가 분명 맥스에 존재하는것 같다. 서사구조도 그렇고 성격과 강한 정도, 외모 등등에서 그랬다. (프랭크 밀러, 조지 밀러… 밀러? 우연일까!?)

  • 인간이 살아남은 세상에선 인간이 인간을 수단화한다. 

WE ARE NOT THINGS !!!(우린 물건이 아니야!!! )

매드 맥스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인간의 수단화’였다. 강자로 대변되는 임모탄은 자신과 자신의 군사들 외에는 모든 인간들을 자신만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워보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위한 군사로써, 여성들은 출산과 모유를 만들기위한 수단으로써, 하층민들은 물을 이용해 자신의 신도들로써 이용한다. 심지어 주인공을 포함한 포로들은 워보이들의 피주머니로 쓰인다. (심지어 사람을 먹는 우두머리도 있다.) 힘이 있는 자들이 물과 식량, 석유, 무기까지도 독점하는 구조에서 임모탄은 ‘신’과 같은 위치로 군림한다. 아니니 다를까. 임모탄은 종교마저 수단화한다. 워보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이루어주면 자신이 직접 천국으로 보내주겠다며 전장으로 내몰고 그마저도 신통치 않으면 가차없이 버린다. 종교와 메시아의 이름만 빌려온 것이다. ‘수단화’의 극단화가 시타델을 군림하게 하는 임모탄의 힘이다.

여담으로 여기서 천국으로 보내준다는건 결국 자기가 직접 죽여주겠다는 뜻인데, 워보이들에게 결국 영예로운 죽음만이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해줄 구원이었던 것은 핵전쟁이후의워보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자라오고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어린 워보이들도 톱니바퀴로 쓰이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Wh- What a Lovely Day !!1 (히힣 히히힉 천국가쟈!!!!!)

  • 스플렌디드(Splendid) – 정말 좋은[멋진], 훌륭한, 아주 인상적인[아름다운]

“그가 말하길, 총알은 죽음의 씨앗이라 했다. 심을 때마다 사람이 죽는다고.” 스플렌디드(로지 헌팅턴 휘틀리)

스플렌디드의 죽음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다. 퓨리오사가 탈출시킨 5명의 여자들의 리더격이자 임모탄이 가장 아끼는 임신중인 여자였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임모탄이 총을 거두고 차를 뒤집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죽음을 통해 나머지 4명의 여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주체성을 부여한다. 그녀의 죽음을 전후로 해서 여자들이 역할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고 망을 보거나 무기를 챙기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동시에 임모탄을 격분하게 해서 추격전의 긴박함과 치열함을 더해준다. 여러모로 석유와 같은 인물이다. 맥스 일행이 녹색땅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동력을 주고, 불과 같은 임모탄 연맹이 더 불타올라 맥스 일행의 뒤를 바짝 쫓게 한다.

  • 녹색 땅,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

녹색 땅. 희망이 있는 곳, 퓨리오사가 태어났던 곳. 탈출의 목적이었던 녹색 땅이 없다는 사실을 안 뒤, 퓨리오사는 오열하고 여자들은 절망한다. 눈 앞에 보이는 희망을 향해 도망치던 이들의 발치에 지금까지 왔었던 길보다 더 먼 사막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신기루일 뿐이었던 희망이 사라진 순간. 그들은 헛된 희망을 만들어 믿고 달려가기로 한다. 녹색 땅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로 그저 달린다. 그저 ‘잘 될꺼야… 잘 될꺼야…’라며 현실을 외면한 채로 반강제적 힐링 혹은 자발적 희망고문을 하는 이들에게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인물들을 어리석다고 욕할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것은 이토록 힘든 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임은 자명하다.

“뭐하는 거야?”

“기도하는 거야.”

“누구한테?”

“누구든 들어주는 이에게…”

맥스는 여기에서 모든 인물들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줄’을 잡는다. 따로 떨어져 그들은 그들대로 두고 자신은 자신대로 떠나갈 수 있었지만 더이상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자신들을 쫓아오는 잔인한 세상. 그들에게서 벗어나 살아가기 위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들이 자멸하지 않는 이상, 마주할 수밖에 없다. 도피는 또 다른 도피를 계속해서 요구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날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부정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주는 맥스. 미쳐버린 세상에서 정신줄을 잡고 두려움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을 통해 그들은 관객들에게 핵심 메세지를 던져준다.

‘정신차려, 현실은 실전이야 이 XX들아!!’

  • 희망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 The First History Man

영화 속 그들은 어디로 가야했던가. 시타델 밖? 초록색 땅? 소금 사막 너머? 그 모든 곳도 아닌 바로 시타델이었다. 물과 석유 자체가 공포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공포인 것이다. 희망을 찾고자 한다면 희망이 있는 곳을 향해 가야 하는 것이지 희망이 있을 것 같은 곳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다. 매드 맥스에서 희망은 계층이 무너지고 평등이 찾아올 때에 비로소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메세지를 멋지게 형상화한다. 크레인이 올라갈 때에 남녀노소의 구분없이 끌어올려 다같이 올라가고 물이 모두에게 흘러드는 장면. 단지 지도자의 자리만 바뀌었을 뿐인데 셀 수 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시타델은 총알(죽음의 씨앗)을 위한 땅이 아니라 씨앗(생명의 씨앗)들이 싹을 틔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절망과 희망은 한 동전에 붙어있는 양면임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희망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스크린에 투사되는 문장이다. 마지막 장면이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가야할 곳은 바로 이 곳. 우리가 매일 숨쉬고 마주치는 바로 이 곳이다. 중요한 건 ‘어디’보다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P.S 그 와중에 기타, 드럼 치는 이들은 영화의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P.S 전략의 핵심은 ‘회군’이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재미가 배가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매품 ‘위화도 회군’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