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1

“너를 쭉 보다 느낀 점이 있는데, 넌 너무 너 자신을 변호하지를 않는 것 같아.”

“무슨 의미에요?”

“무언가에 대해서 지적하면 그래도 너가 열심히 한 것들에 대해서 피력할 법도 한데 그런건 하나도 없잖아. 아예 아무것도 안 한것도 아닌데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야.”

“그래도 제가 부족하니까 그런 말을 들은 거 잖아요? 거기서 되받아서 말하는게 맞는 것도 아닐테고…”

“지적을 받아들이는 건 좋지만 넌 지적하는 상대를 너무 배려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되려 준단 말야. 난 사람이 좀 기분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데 넌 그게 전혀 아닌거 잖아?”

“…..”

“그러니까 음… 넌 좀 너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어.”

“조금씩 어려워지는데요.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런 건가요?”

“글쎄… 그건 사실 나도 잘 못하니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게 진짜 안 되더라고요. 이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참 없는데, 어떻게 제가 좋아하라는 건지…”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가 나온 건지도 몰라. 그렇게나 어려운 거니까 각인시키려고…”

“종교가 힘있는 이유가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왜 기독교에서는 Jesus Loves You라고 하잖아요. 너가 어떻더라도 하나님은 널 사랑하신단다 이러고…”

“어쨋든 너를 가장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뿐이라는거야. 물론 너보다 더 너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한 때이거나 항상 그렇지는 않아.”

“그건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별로 끌어오고 싶지 않네. 어쨋든 넌 좀 더 너 자신을 용서하고, 인정하고, 보호해줘야 해. 사실 그래야 좀 지적하거나 이야기할 맛도 나는거지. 한 쪽이 픽 죽어버리면 다른 쪽도 힘이 빠져버리는 법이야.”

“윤종신의 ‘나이’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날 사랑해. 난 아직도 사랑받을 만해.’, ‘날 사랑해 날 용서해 지금부터.’ 이런 가사가 나와요. 그걸 듣다보면 감동은 받아도 공감은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게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어요.”

“솔직해져야해. 어떤 감정의 상태는 있는 그대로 직면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발전해 나갈 수가 있어. 다른 사람을 너보다 더 배려할 필요는 없어. 계속 이러다보면 너의 안은 텅 비어버리고 밖은 너무 가득 차버려서 어지럽혀지고 말 꺼야.”

“…..”

“지금보다 훨씬.더 너 자신을 아끼고, 자랑스럽게 보고, 변호하고, 인정하고 용서해줘. 그렇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 편하자고

어떤 것이든지
정의를 해야만
속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음식은
어떤 맛의 정의를 가졌고,

이 날씨는
어떤 느낌인거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정의한다는 것의 함정은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버리도록
만든다는 것 같다.

관계 또한 그렇다.

둘의 사이를
무언가로 규정하는 순간
마음은 위험해진다.

나도,
그런 사람들중에 하나였었다.

그래서
그렇게
수많은 시간들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 좋았을 때로
망쳐버렸었나보다.

복잡한 것이 싫다는 핑계로
난 너무 게을렀던 것이 아니었을까.

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물리적인 거리도 있고
심리적인 거리도 있단다.

물리적인 거리는 제쳐두고
심리적인 거리를 보았을 때에,

이를 잘 지키는 사람이
건강한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동료나 아는 사람 정도가 하는 말을
너무 가깝게 듣거나

실제로는 가깝지도 않은데
가까운 걸로 착각해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 거리가 행동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행동이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고도 들었다.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다 보면
어느새 그 정도로 거리가 형성되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이 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거리를 벌리는 데에는 슬픔이,
좁히는 데에는 아픔이 뒤따른다고도 했다.

정말 한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도 싶다면
그 아픔을 기꺼이 감당하고서
마음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어찌보면
사랑이라는 말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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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작년 7월이었다.

한 노부부가 학교 앞 갑천을 따라
해가 지는 속도보다,
그림자가 자라는 속도보다
느리게, 더욱 느리게…

흐르는 물에게 앞을 내어주면서
그렇게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멋스러운 빵모자를
땀이 덮은 이마에 걸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할머니가 골라준 것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빛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해질녘은
나에게도 참 더운 시간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생겼을
노부부의 주름 사이로 땀이 흘렀다.

할머니가 뒤쳐지는 걸 느낀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스르륵
해를 마주하고 할머니를 등지는 위치로 가
다시 걸으면서 손을 등 뒤로 내밀었다.

할머니도 아무런 말 없이
그 손을 잡고서
할아버지의 왼발과 오른발에
맞춰서 그저 걸었다.

아,
저게 바로 같이 걷는다는 것이겠다.

약간의 침묵이 지난 뒤에
헛기침을 하고 할아버지가
그 색색의 빵모자를 벗고는
멋쩍게 말했다.

‘내 이러려고 살이 찌고 덩치가 커졌나 보오, 임자.’

할아버지가 눈 앞에 해를 두고 만든
그 둥그런 그림자로
할머니를 시원하게 덮었다는 것에
크나큰 가치를 느낀 것일까.

할머니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알 수 있을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어쩌면 저게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흔하지 않은 영원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나갔던
7월의 풍경이 하나 있었더랬다.

201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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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서 다른 곳으로
나를 옮겨가는 그 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차체는 별 움직임없이 차분해진다.
그 동안 책을 읽거나
눈을 감고 있다 뜨면 보이는
변화무쌍한 가까운 풍경과
차분하게 머무르는 먼 곳의 풍경과
하늘을 비교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소일거리가 되어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뒤쪽의 자리를 제일 좋아했다.
침대 귀퉁이에 밀려나있는
조그만 쿠션이 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요즘엔 앞자리가 더 좋다.
빨리 앉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묵묵하게 나를 데려다주는
저 버스기사 아저씨는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떻게 이 커다란 버스와 같이
달리고 있을까를 엿볼 수가 있어서이다.

뒤따라가고,
때론 앞서도 가는 같은 길의 자동차들과
반대편에서는 더 빨리 지나치는
수많은 이들은

기사 아저씨에게는
풍경일까.

풍경이 아니라면
그저 무엇이 되기 전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