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 감상문 : [소수의견] 정의의 여신은 과연 눈물을 흘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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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소수의견]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소수의견’에 대한 보도자료들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같이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용산 참사 사건이다. 철거민들과 용역, 경찰들이 얽혀서 만들어낸 비극. ‘국가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드러낸 그 사건. 허나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책 소수의견의 저자인 손아람 작가와 감독 김성제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작품에 용산 참사는 하나의 ‘모티프’일 뿐이다. 절대 용산 참사에만 국한된 작품이 아니다.

분명 용산 참사와 이 영화간에는 상동하는 부분은 존재한다. 허나 영화 ‘변호인’이 부림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영화라는 점과는 대조되지만 영화 소수의견이 용산 참사를 토대로 해석되기 쉽다는 것을 제작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써진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 영화는 그저 하나의 ‘픽션’이라는걸 제작자들은 강조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되는 건 용산 참사와 연관시켜서 말을 돌리는 것 아닐까? 그들은 이 작품이 그저 용산 참사 프레임에 갇혀서 공분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하나의 실화에 국한된다면 확장은 제한된다. 그렇게 되면 구조는 단순해지고 감상은 쉬워질 것이다. 더해서 감정의 폭은 넓어지고 강렬해지지만 깊고 길게 기억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카타르시스는 ‘해소’이지 ‘인식’이 아니다. 혹자들에게는 아쉬운 이야기이겠지만 영화 소수의견은 카타르시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 ‘불완전함’으로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

미리 말하자. 난 이 영화를 정말 높게 평가하고 싶다. 힘을 조금 더 실어보자면, 근래에 접한 한국 법정 영화들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하고 싶다. 정말이다. 미장센이 어마어마하게 대단하다거나 신들린 듯한 배우들의 연기 혹은 원작을 훌륭하게 영화로 재현해냈다 등의 이유가 아니다. 어설프게 정리해본다면 ‘불완전함’으로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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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수의견의 인물들중에서는 성품이 완벽하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행동만을 골라서 하는 이들이 없다. 다시 복기해보자. 숱하게 나왔던 부당하지만 절대적인 강자들에게 대항하는 정의롭고 약한 주인공들. 개인적으로 이들을 통해 빚어낸 법정 영화, 드라마들은 뚜렷한 법정 장르를 만들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 그 많은 작품의 결론이 ‘법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이 귀결이 정의로운가 아닌가?’ 더해서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향해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너 잘했어요? 잘못했어요?’, ‘얘네 인간적으로 벌을 받아야해요? 안 받아야해요?’, ‘그러니까 이런 저런 법을 근거로 벌해야겠네요!!’ 이런 식이다. 즉, 법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귀결되고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는 사견이니…)

으아 땅땅땅 !!

이 영화는 그런 노선에서 벗어난다. 검사측과 변호인측이 모두 도덕적으로 완벽한 혹은 부패한 인물들만 있지 않다. 이들은 각자의 입장과 승리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 선을 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사건 자체와 인물들이 처하는 상황들이 딜레마의 연속임에도 대립 구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법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원고와 피고가 나뉜다. 원고는 꼭 이래야하고 피고는 꼭 저래야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도 사람이다. 관념적인 특성에 현실을 맞추는 클리셰를 소수의견은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사의 톱니바퀴는 삐걱거리지 않고 나름 잘 굴러간다. 그들의 싸움은 공판의 승리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 사소한 듯 하면서도 큰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가능성을 만들었다.

  • 변호사 ‘윤진원’과 배우 ‘윤계상’의 성장.

이 영화.  출연진들이 나름 빵빵하다. 유해진, 김옥빈, 이경영, 김해효 등등… 검증된 신예부터 베테랑 배우들. 허나 폭 넓게 배치된 라인업들의 장기말 싸움에서 내게 가장 돋보였던건 윤계상이었다. god의 윤계상이 고군분투한 그 결과, 그는 매우 뛰어난 배우가 되었다. 분명히 그는 성장했다.

그런 그가 연기한 변호사 윤진원도 영화안에서 성장해간다. 위에서 법정 영화 이야기를 줄곧 해댔지만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상 성장담이다. 조금 더 잔혹한 법정 미생이라고 해야할까. 로펌을 어디로 들어갈 수나 있을지 궁리하며 원서를 이곳 저곳에 넣으며 고군분투하는 이미지는 취준생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비정상적인 법조인들과 그들의 생리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도 수긍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설정한 방향성을 그는 지켜내지 못한다. 차를 수리하다가 몽키스패너를 집어던지고 차도를 가로지르듯 방황을 거치고 부딪히고 좌절을 겪는다. 남들이 다들 그렇듯이 말이다. 물음표로 점철된 그 끝에 다다를수록 보다 더 단단해지는 그를 보게 된다. 입장이 바뀌는 그에게 성질이 나기보다 차분하게 지켜보게 된다.

  • 피해자, 피의자, 검사, 변호사, 판사 그리고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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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법정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헌데, 지금까지 봐온 바에 따르면 많은 작품들에서 그려진 모습은 단순한 ‘메신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규칙과 역학을 가지고 돌아가고 그 결과의 여파는 어마어마한데도 말이다. 수도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던 이들을 정면으로 내세워 조금이나마 다루었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저, 이 기사 씁니다.’

김옥빈이 분한 기자 수경이 뱉는 주요한 대사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똑같은 대사를 하는데 그 기사가 가져오는 결과가 사뭇 상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이 국민재판에 대해 여론을 부여하고 규모를 키우는 일종의 순기능을 발휘하지만 후반부에선 되려 그 사건을 불리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에 일조해버린다. 왜곡 보도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수경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저 기자에요.’

변호사 진원이 수경에게 기사를 쓰지 말라고 말리자 그녀가 답한 말이다. 그녀는 기자다. 기자는 언론에서 기사를 쓴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녀는 그 정보가 기사로 다루어져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자는 항상 알 권리와 그 외의 항목들 사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그녀는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들을 잃은 박재호(배우 이경영)를 살릴 수 있는건 언론이 아니라 법정이라고 한 진원의 말도 맞는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언론은 언론이다. 그 양면성마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기자는 미안해하는 순간, 기사를 못 쓰는 법이에요.’

  • 물론, 옥에도 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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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칭찬을 늘어놓았으니 아쉬움도 몇 자 적어보자. 초반부에 기자 수경과 변호사 진원이 대화를 하다가 법률 용어가 나오자 갑자기 어색하게 설명구도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아, 기자님.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면서 대사를 주고받는 그 부분은 정말이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싹둑 흐름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오글거리는 설정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이해는 간다. 법정 영화에서 법정 용어들은 다뤄지지 않을 수가 없다. 허나 관객들은 대부분 그 의미를 모른다. 감상에 이런 걸림돌에 한 번 넘어지면 몰입도는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방지하고자 처음에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에서 처럼 코드 네임을 분별하려다가 엔딩을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벙찐 상황이 벌어질테니 말이다. 그래도 아쉬운건 아쉬운 거다.

조금 더 걸고 넘어져본다면 미장센이 좀 부족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영화로 만들어진 이상, 미장센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 두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아들을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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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도 눈물은 있답니다.’

검사측에서 ‘치사죄’를 설명하면서 덧붙인 말이다. 의경이었던 아들은 잃은 아버지와 철거민인 자신의 아들을 경찰때문에 잃은 아버지는 법정에서 증인석과 변호인석 옆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둘은 역설적이게도 법적 입장이 다름에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이다. 둘은 결국 눈물을 흘린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속에서 나는 썩은 내는 십리 밖에서도 진동을 한다고 했다. 무엇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명확하게 모른 채 느끼는 아픔에 대한 슬픔이 아닐까. 결국 아픔과 죄는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다.

법은, 정의의 여신은 과연 눈물을 흘리는가?

어느 쪽이 소수의견이었으며 그들에게 법은 어떤 표정이었는가?

국가는 여기에 어떤 잘못이 있었고 어떤 책임이 있었을까?

두 아버지의 비극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마지막 그리고 광화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전관예우를 받은 주제에 주인공앞에서 유세를 떨던 부패한 검사. 왠지 올곧았던 진원과 이혼변호사였지만 깊숙한 곳에 정의감이 남아있던 변호사 대석(배우 유해진)의 연장선상 끝에 있는 존재같았다. 모든 법조인들이 처음부터 부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위 ‘꼰대’도 아니었을 것은 자명하다. 법과 정의를 다루면서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인마!’ 하면서 타협을 입에 담는 모순을 범하게 된 그들이 기득권층이 되고 시스템을 자신들을 위해 악용하면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철거가 결국 다시 진행되는 장면에 이어 보여줬던 그 마지막 장면, 진원이 그 검사의 명함을 냉소와 함께 버리던 그 장면에서 난 꼰대에 대한 감독의 환멸을 느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P-type의 광화문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그냥 불현듯말이다.

이 구절이 그렇게 맴돌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이 노래로 이번 감상문을 마친다.

[Verse 3]

투박한 일상과 온종일 싸운 뒤에 느낄 거야, 내일도 널 욕보일 삶
현실에 대한 답 중 선택은 착각쯤 되나?
일상과 이상과 세상 사이엔 늘
못 갖춘 수많은 자격들… 너도 뭐 차차 겪을 거야
오늘 자 기억들, 곁들인 건 소주 한 잔의 반가운 해방감
나의 밤관 상관없다 방관한 타인의 삶
반강제로 수긍한 이 시스템
시스템 위에 시스템이 낳은 시스템
권력이 거리에 미메시스된 피라밋 같은 건물들
그 속에서 곧 물들거나 늙을 어린아이였던 속물들
귀찮아도 눈을 떠, 삐걱대면서 버텨
과연 이러는 게 똑똑한가?
하루는 비참하고 다른 하루는 비겁해
오늘 난 옛날의 나에게 떳떳한가?

  • P.S

이 영화를 검색해보면 소수의견(2013) 으로 결과가 나온다. 왜 그럴까? 실제로도 영화에 등장하는 서류들을 보면 년도가 모두 2013년도로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은 이 영화를 2013년도에 이미 다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개봉이 늦춰지고 또 늦춰졌다고 한다. 이번 년도에 와서야 마침내 개봉하게 된 것인데 글쎄…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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